과장: 날씨도 으스스하고 출출하네(한잔하러 가는 게 어때?).
대리: 한 잔 하시겠어요?(제가 술을 사겠습니다).
과장: 괜찮아, 좀 참지 뭐(그 말을 반복한다면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대리: 배고프실 텐데, 가시죠?(저는 접대할 의향이 있습니다).
과장: 그럼 나갈까?(받아들이도록 하지).
서로가 상대방의 의중을 세심히 짚어가며 말하고 듣는다는 점에서
아름답고 세련되게 들린다.
그러나 양쪽 모두 상대방의 의중을 떠볼만한 시간이 많지 않을 때는
이러한 대화법은 어울리지 않는다.
1997년 8월 5일 오전 1시42분. 괌 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던 대한항공 801편이
쾅 하는 굉음을 내며 공항 인근 야산으로 추락했다.
탑승객 254명 중 228명 사망. 대형 참사였다.
일반적으로 비행기 사고는 사소한 기술적 잔고장, 나쁜 날씨, 피곤한 조종사라는
요소가 결합되어 일어난다.
그런데 사고 항공기의 블랙박스 판독결과 사고원인에 대한 색다른 분석이 제기됐다.
당시 괌 공항 주변에는 열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기장은 많이 지쳐 있었는데 부기장이나 기관사는 폭우 가운데서
기장이 잘못 판단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기장에게 직접 바른 말을 못했다는 것이다.
부기장은 "야, 비가 많이 온다"는 기장의 말에
"예, 더 오는 것 같죠"라고 대답했지만,
실은 이 안에 `비상대책 없이 시계접근을 하는 대신 바깥 날씨가 끔찍하니
비상대책을 세우자'라고 말했어야 했고,
기관사는 혼잣말처럼 "오늘 기상 레이더 덕 많이 본다" 라고 했지만,
`육안에 의존해 착륙을 시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기상 레이더를 정확히 보라'고,
경고했어야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고 후 대한항공은 외국인을 비행 담당자로 고용했고, 그는 `대한항공의 공용어는 영어다.
만약 대한항공의 조종사로 남고 싶다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정책을 취했다. 높임말도, 반말도 없는 영어를 사용해 `경고를 확실하게 하라'는 취지였다.
대한항공은 2007 베스트 비즈니스 트래블 어워드 시상식에서 `아시아 최우수 항공사' 부문과
아시아태평양지역 `최우수 비즈니스클래스 운영 항공사' 부문을 수상할 정도로 발전했다.
완곡어법이 성과에 악영향을 미치는 곳은 비단 비행기 조종석만이 아니다.
당장 패스를 하고 골을 넣어야 하는 축구장에서도,
선배님이 두려워서 말을 할 수 없다면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없다.
2002년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 거스 히딩크는, 그 점을 파악해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월드컵 4강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
히딩크가 처음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으로 부임했을 당시 선수들은 훈련 중에도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밥을 먹을 때에도 자기들끼리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섞이려 들지 않았다.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히딩크는
며칠 후 선수들을 모아놓고 파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나이가 많건 적건 선수끼리는 무조건 반말을 한다. 밥 먹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살아온 선수들에게 히딩크의 말은 그야말로 황당 선언문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던 찰나, 대표팀의 막내 그룹이었던 김남일이
최고참 선배인 홍명보를 보며 한 마디 툭 던졌다.
'명보야, 밥 먹자!“ 식당은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했고, 대한민국은 이기고 또 이기며 승승장구했다.
축구는 경기중에 다급한 상황 계속 연출되는데, 이럴때마다
"명보 형님 이쪽으로 차 주세요~!" 하는 것보다 "명보형 이쪽으로 차!" 라고 하는것이
훨씬 더 간결하고 정확하고 빠른 소통이 전달된다라는 긍정의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은 “축구경기는 경기 외적인 요소가 큰 영향을 미친다”면서
“특히 고참과 신참간의 대화단절 문제를 조율하는데 힘써 월드컵에서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2년 6월, 평등했던 우리 팀은 그래서 참 뜨겁고 강렬했다.
사실 한국적인 문화에서 말을 듣는 사람 중심인 청자화법에서
말을 하는 사람 중심의 화자화법 중심으로 옮겨가기란 쉽지 않다.
정확하고 냉철한 의견을 밝혀야 하는 법률의견서에서도 직접적으로 법률위험을
고지하는 문구를 쓰면 선배로부터 보다 완곡하게 표현하도록 지적 당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급하고 중요한 업무분야일수록 완곡화법보다 직접화법이 필요하고 위기일수록
그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상대방을 세련되게 고려해주는 우리 문화도 아름답게 살려가되,
위험성이 높은 분야일수록 위계와 상관없이
위험을 직접적으로 고지하는 어법과 문화를 허용하는
성숙된 접근이 필요한 때이다.
출저 :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0905260201226963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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